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라벨은 모두 2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기고 있다. 하나는 왼손을 위한 협주곡 D장조이고 다른 하나는 G장조이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하여 한쪽 팔을 잃어버린 오스트리아의 명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협주곡 G장조는 라벨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작곡된 이채를 띠는 작품인데, 그것은 전체적으로 현대적 기법을 사용하며, 1악장과 3악장은 재즈적인 요소가 있으면서도, 2악장 아다지오는 마치 낭만파 작품의 느린 악장과 같은 서정성이 극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다지오의 선율은 라벨이라는 작곡가의 풍부한 시정을 엿볼 수 있는 놀라운 곡상이기도 하다. 마치 물과 기름 의 섞임과도 같은 큰 대비감을 보여주는데, 한편, 종악장은 낭만주의적 열광과, 바스크 지방에서 얻은 영감적 민속주의도 있다.
이런 곡상은 이질감이 없지 않으나 대조의 미를 보여주고 있어, 라벨의 고전주의를 바탕으로 한 기하학적 계랑이 일견 동떨어진 것에서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일컫어 작곡가 알베르 루셀은 자신의 ‘이성의 감수성’에 빗대 ‘감수성의 이성’ 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곡은 그의 나이 56세 때인 1931년 작곡에 착수하여 이듬해 완성, 파리에서 롱의 피아노와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이 이루어졌다.
라벨 자신은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차르트나 생상 협주곡의 정신을 이어받아 작곡하였다. 협주곡이란 명쾌하고 화려해야지, 깊이 있고 극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처음 이 곡에 <희유곡>이란 제목을 붙이려고 하였다. 여기에는 재즈적인 요소도 들어있다.”
어쨌든 스트라빈스키의 지적대로 ‘스위스 시계처럼 정밀한’, 그리고 세밀하게 직조된 그의 후반기를 장식하는 라벨의 천재성이 돋보인 걸작으로, 아다지오 악장 하나만으로도 피아노 협주곡에서 명작의 위치에 오를 만큼 명품 중의 명품이라 하겠다.
라벨 피아노 협주곡 음반은 흔히들 두 곡이 같이 수록된 것도 있고, 왼손의 기량이 충분히 못한 피아니스트들은 G장조만을 수록하고 있기도 하 다.

 

백건우 - 라벨: 피아노 협주곡

연주는 초연자인 롱의 피아노와 라벨 자신의 지휘로 된 음반이 펄 레이블로 나와 있다. 비록 모노 음반이긴 하지만, 이 곡의 이상을 재현한 최고의 명연주로 남아 있다. 특히 2악장 아다지오 의 청아한 선율 연주가 압권인 초연자들에 의한 기념비적인 명반이다.
한편, 롱은 브랑코와 협연한 연주(EMI, 1934)도 있으나 다소 떨어진다.
프랑소와 연주는 그가 이루어낸 음색의 감칠 맛이 뛰어나게 나타난 명연이다. 감정보다는 감성적 분위기가 충만한 시적인 독특한 연주로, 프랑스 적인 예지와 아취를 잘 살려내면서도 재즈적인 감각도 잃지 않은 훌륭한 연주이다.
다음은 백건우의 놀라운 명반이다. 백건우의 연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음반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라벨 협주곡 연주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 한마디로 최고의 명연주를 펼치고 있다. 가장 압권인 부분은 2악장 아다지오의 연주이다. 감정의 풍부한 정감을 가장 깊게 드러낸 최고의 연주로서, 이 악장에서 피아노와 목관 파트 독주가 펼치는 정겨운 대화조의 묘미가 놀랄 만한 기량을 유지한다. 특히 오보 솔로는 그야말로 절품이다. 또한 베르티니가 지휘하는 슈투트가르트 방송 심포니의 완벽한 반주가 이 음반의 가치 를 더욱 드높이고 있다. 음질도 뛰어나,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환상의 명반이다.
다음으로는 미켈란젤리의 연주이다. 관현악 반주가 피아노에게 끌려다니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지만, 미켈란젤리의 독보적인 피아노의 기량과 울림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명연주이다. 특히 2악장 아다지오는 냉정한 미의식에 입각한 표현과 피아노 음색의 미묘한 떨림으로 재현되는 미의 세계가 발군이다. 목관 파트와의 대화보다는 피아노의 압도하는 주도적 역할이 강조 되어 비르투오조적인 놀라운 기량이 돋보이는 명연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아르헤리치 두 번의 녹음을 남겼다. 아바도와의 첫연주(DG, 1967, 베를린 필)는 야성적인 연주이며 신녹음(DG, 1984, 아바도 런던 심포니)은 이전에 비해 다소 차분하다. 둘 다 좋은 연주이나 신녹음이 좀더 나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전체적인 연주수준은 평범한 것 이기도 하다.
라벨의 직제자인 페를뮈테르의 연주(VOX, 1955)는 라벨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프랑스 출신의 로제의 연주(DECCA, 1982)와 베르너 하스(PHILIPS, 1968)도 주목할 만한 호연들이다.
이외에는 라로차, 로르티, 앙트르몽, 코치쉬, 카자드쉬, 찌머만, 번스타인 등이 있다. 이중 불레즈 협연의 찌머만의 연주(DG, 1996)가 새로운 명연주로 평가받고 있다.
음반의 선택이다. 롱의 역사적인 명연, 프랑소 와의 전통의 명연, 미켈란젤리의 독보적인 감흥, 그리고 아르헤리치의 연주도 좋은 점이 많은 연주라 생각되지만, 백건우의 연주는 이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최적의 명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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